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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기묘한 경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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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을 2023. 8. 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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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묘한 정신과의사 정리을의 '기묘한 경험' 글 6개 중 첫 번째 글입니다. 

 

 

 




"음? 이분 lung(폐)에 multiple cancer(다수의 악성종양)? 아.....original lung cancer(원발성 폐암)에 multiple metz(다발성 전이).....에휴....."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어떤 여성 분 두 분이 조용하면서도 안쓰럽다는 듯이 주고받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렸고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폐암 말기이고, 기대여명이 기껏해야 3개월에서 6개월 밖에 안 남았다고?  

 평소 삶에 대한 애착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언젠가 내가 죽음의 순간을 맞는다면'이라는 수 없이 많이 해 봤지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기대 여명이 반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순식간에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느낌, 우주에서 부족한 산소게이지가 내려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 중력에 이끌려 어디론가 흘러가버리는 그런 느낌이 몰려왔다.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야 하나?' '오래 살아남을 자신은 없으니, 고통이 심해지기 전에 서둘러 스스로 결정을 해야만 하나?' 이런저런 수많은 생각들이 짧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오가기를 반복했다. 짧으면 10분, 길면 30분 정도, 내 생각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일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선생님, 얼굴이 좀 부은 것 같아요." "살찌신 것 같아요." 같은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가 봤는데 이게 웬걸, 평소보다 10kg가량이나 더 나갔다. 처음엔 믿기지 않아서 쿠팡 로켓배송으로 다음날 새로운 체중계로 재 봤는데, 똑. 같. 다. 이럴 수가! 그래서, 바로 그날부터 하루에 바나나 3-4개에 코카콜라 제로만 마시고 버티는 절대 의학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다이어트방법을 시작했다. 대략 1개월 만에 7kg 정도를 감량했다. 단지 굶어서 뺀 거였으니 근육량도 줄어들었을 테고 체력적으로 영향도 있었으리라. 

  사실 그 당시,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의원 큰길 맞은편에 의원 확장 허가를 내준다고 하더니만 인테리어와 간판까지 끝난 다음에 변경 신청을 하자, 다시 담당자분이 의원확장 거절 의견을 주셔서 결국 수천만 원에 달하는 인테리어비용과 간판비용, 그리고 향후 계약 2년 동안 수백만 원의 임대료와 관리비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걸 만회하고자, 하루에 5시간씩 주 7일을 근무하는 것으로 엄청난 손실을 줄이려고 매달렸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스트레스와 피곤이 극에 달했다. "제발, 오늘 하루만 더 버티자....."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왔던 기억이다. 

  그러던 바로 그전 날, 진료를 마치고 7시쯤 되어서 친구를 만나서, 치킨 한 마리에 맥주 2000-2500cc 정도, 아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취하기에는 충분한 양이기는 했다. 

  집에 돌아와서 얕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술을 마시면 항상 수면은 엉망이 된다. 그날은 2시간가량 밖에는 잠을 못 잤는데, 중간에 구역감에 화장실에서 두세 번 토악질을 했다. 그러다가 침대에 누워 두어 시간 잤던가, 혹은 그냥 누워있었던가, 배가 너무 고팠다. 먹은 걸 다 토했으니 그럴 수밖에. 한우국밥집에서 '특'한우곰탕을 시켜 먹었다. 먹을 때에는 맛있게 먹었는데, 아..... 그 시점부터 최소한 30시간은 계속 구토를 했으니 정말 끔찍한 선택이었다. 이후 구토에는 한우기름의 냄새가 계속해서 듬뿍 배어 있었고, 나중의 일이지만 그놈의 한우국밥을 먹은 걸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그 이후로 내가 먹은 것을 모조리 다 토했다. 그냥 그 긴 시간 동안 구토만 했다. 다른 것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설명을 덧붙인다면, 처음에는 집에 있는 콜라를 마셔봤고, 폭포수와도 같은 장관을 볼 수 있었다. 그 만만한 포카리스웨트조차도 받아주질 않아서 전부 게워내고, 물을 마셔도, 물조차도 토했다. 하지만 너무 갈증이 심해서 다시 물을 마시고, 또 토하 고를 반복했다. 계속 토하니까, 위 바닥을 다 긁어내다 못해 구토에서 거품이 심하게 올라와서 토하면서 거품에 질식할 뻔했다. 아무리 심한 숙취라도 보통 다음 날 오후나 저녁때쯤에는 괜찮아졌었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후부터 밤 12시까지 계속 물을 마시고 물을 토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속 구토를 하다 보니, 구토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최소한 쉰 번은 토했으니까 당연히 식도나 위 쪽 부분이 긁히거나 찢어져서 그럴 수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계속해서 구토를 하다 보니 걱정이 더럭 들었다. 구토에 의해 식도부위가 찢어져 대량출혈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물 밖에 안 마시는데도 계속 나오는 토사물은 점점 혈액이 선명하게 보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응급실에 가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다. 밤 9시까지만 참아보자, 괜찮아질 거야, 밤 10시까지만, 11시까지만, 계속 머뭇거렸다. 12시까지도 계속 피를 토하면 응급실에 정말 간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홀로 터덜터덜 밤 12시에 아파트에서 내려와서 어렵게 택시를 잡고 "A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주세요." 

  정말 절실하게 느꼈다. 응급실은 응급하지 않다는 것을, 응급한 사람들이 가는 곳일 뿐. 보호자 없이 혼자 가니까 접수도 안 해주려는 것을 정말 비참하고 비굴하게 "저 여기서 몇 년 전에 교수직으로 근무도 했었어요, 사정 좀 봐주세요." 정말 비굴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한번 여기 근무했었다는 것만으로 꽤나 대우를 받고 굉장한 친절함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부를 때 '교수님'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극존칭까지 써 주시면서. 당연히 위장관 출혈이 의심되니 그때  L-tube(코를 통해 말랑한 플라스틱 관을 넣어서 위장관까지 연결시키고, 이를 통해 위를 감압시키거나 생리식염수를 주사하고 다시 뽑아내는 식으로 위 내용물을 확인하는 방법)을 하려고 인턴선생님께서 다가왔다. 별 것 아니라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겪어보니까, 별 일이더라. 코에서 시작해서 위장에에까지 느껴지는 이물감, 혀 뒤쪽과 목편도를 자극하면서 느끼는 심각한 구역감이 극심했다. 생각해 보니 황당했다. 나는 L-tube를 단 한 한 번도 나 스스로 겪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L-tube를 환자분들께 삽입해 본 것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천 번이 넘었을 테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 아프고 힘든 술기들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조금만 참으세요 환자분-'하면서 해왔었다...... 

  그곳에서 잠시 재직했었다고, 베드도 가장 스테이션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 주었던 호의 때문에, 응급실 스테이션 안 쪽의 그 두 분이 하시는 대화를 너무나 선명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언급했던 "Original lung cancer, multiple metz"라는 그 무서운 말을.

  어쨌든 나에게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은 확인을 하고, 자의퇴원 서약서에 퇴원서약을 하고 나서니 새벽 3시쯤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다. 물론 팔에 놓은 수액들이 수분을 보충해주고 있었지만, 입은 타들어갈 정도의 갈증으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눈앞에 수돗물이라도 있었으면 벌컥벌컥 마셨겠지만, 수돗물보다 다행히 응급실 보호자 대기실의 정수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최소한, 30컵의 물을 마셨다. 그리고 약간 정신이 들면서 병원 밖으로 나섰다. 

 

 새벽 3시.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기 암환자가 되었던 그때의 생각과 느낌들. 그리고.....

 

 내가 치료하던, 치료했던, 몇몇 암환자들이 떠올랐다. 그들 앞에서, 인생, 도 터득한처럼 이런저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소리들을 지껄이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운 모습으로 떠오르고, 지나쳐갔다. 마음을 챙기라느니 명상을 하라느니, 불안감에 맞서라느니...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다. 나는 그때 그분들의 암담함을 정말 일 퍼센트라도 공감하고 있었던가, 그러려는 노력이라도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고 느꼈겠지만, 하지만 최소한 내가 방금 전에 느꼈던 약 30분 동안의 말기 암환자의 느낌은, 정말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너무 어렵다. 뭔가 까맣고,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고 숨이 턱끝까지 차 오르는데도 발 디딜 곳이 보이지도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나약하고 연약한 내가 그분들 앞에서 무슨 얘기들을 했던가, 대체 어떤 부끄러운 짓들을 몇 년씩이나 내가 해왔던가. 하필 바로 며칠 전에, 암을 진단받고 치료 중인 분이 내게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선생님도 한번 저 같은 경험을 해보시면, 그때는 뭔가 자신을 바라보는 생각이 달라질 텐데." 대략 이런 비슷한 뉘앙스의 얘기들을 바로 며칠 전에 들었었는데, 내 머리는 그 말을 담을 생각도 안 하고 스쳐 지나가버렸던 것이다. 그분 말고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유전성 질환에 걸려 예방적 장 절제술을 해야 해서 "우울해지기 전에 미리 약 처방받으러 왔어요."라고 의연하게 말하던 어린 친구도 생각이 났다.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뇌출혈의 트라우마틱한 기억으로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던 분도, 너무나 큰 어려움 없이 쉽게 살아온 내가, 그들 앞에서 뭐라고 지껄였던가.  

 나약하고 비열했다. 정신과 의사라는 자격이 내게 정말 합당한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극심한 낙담과 우울에 빠졌다. 나는 그때 정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바보. 병신새끼. 니 따위가 무슨." (장애우를 가족으로 두신 분들이 굉장히 싫어하는 표현임을 알고 있지만, 그때의 감정을 나 스스로 그렇게 표현했기에 양해를 구하며 수정 없이 그대로 둡니다.) 막막했다.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사람이기 이전에 정신과 의사다'라는 건방진 표현을 썼던 내가, 사실은 뭣도 아닌데 작은 자극에도 무너져버리고, 조금이라도 덜 불안하려고 자존심을 팔아버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데.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정신과 의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지금까지 보고 배운 게 의사짓 밖에는 없는데, 그래도 정신과 의사를 계속할지언정 차라리 강남역에서 보톡스 놓고 제모레이저 쏘면서 피부미용 의사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정말 진지하게 했다. 머리를 흔들면서 오열을 하며 눈물을 흘려가면서. 나 자신을 계속 탓하고 나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아, 나는 뭐지 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시간이 느려졌다." 정신과 의사의 '기묘한 경험' [2/6]

이 글은 '기묘한 정신과의사 정리을의 '기묘한 경험' 글 6개 중 두 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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